[소설] 양귀자, <모순> /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 야샤르 케말,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 조세희,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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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문학의 고발성에 대해 나는 그다지 중점을 두지 않는다. 어떠한 문학이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상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고 굳이 그것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회 고발적인 작품들이 나오는 것은 그것이 고발성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비관적인 것에서 비로소 예술성을 찾게 되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말한 4가지 작품 역시 이 비관성이 나타나 있는데 ‘모순’에서 볼 수 있는 빈부격차와 자살,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진정한 행복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 등은 가장 현시대에 일침이 되는 것 같았다. ‘한없이 투명한 블루’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일탈적이고 타락적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사회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 이렇게까지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 동감하기 어려웠던 소설이었다. 그것은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어쩌면 내가 ‘모순’의 주리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들게 하는 동시에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구절에 자기반성을 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다.

우선 내가 모순을 가장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안진진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좋지 않은 가정환경을 방관적으로 바라보는 자세부터가 일단 그랬다. 안진진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 이렇게 살면 안된다고 외치며 삶에 적극적 자세를 취한다고 하지만, 그래서 두 사람 사이에서 고민하고 누구를 선택하고 결혼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나는 과연 안진진이 적극적 삶을 산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져본다. 안진진에게 사랑은 어쩌면 사치가 아니었는가, 혹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사랑도 사랑이 아니라 도피가 되어버리지는 않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내가 낭만주의자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충돌이 잦은 가정,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나 그 대상이 되는 어머니나 반항적인 언니. 그리고 방관적인 나. 내가 정의 내릴 수 있는 우리 가족의 특성은 이렇다. 그래도 나는 꿈을 꿨다.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라도 나에게 공상을 주시는 신께 감사하면서. 나는 기본적으로 그랬다. 비관적이기보다 낙관적이었다. 죽기보다 더 할까 하는 생각을 낙관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래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무는 쥐였다.

내가 안진진처럼 이렇게 살지 말자, 좀 더 적극적으로 살아보자 라고 생각한 것은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을 때였다. 그때 나는 어머니의 행복이냐 나의 행복이냐를 저울질하면서 결국은 나의 행복을 꾸미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붙여놓았다. 그 후 다시 싸움이 날 때면 경찰을 부르기도 하는 등 적극적인 대책을 해 보았지만 나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았을 때 내가 적극적인 것이었는가 하는 데에 아니다는 대답이 나온다.

나는 지금까지도 지극히 방관적인 삶을 살고 있다. 나의 이런 가정 속에서 나에게 사랑이란 사치였다. 그럼에도 가족을 벗어날 수 있으면 무엇이든 좋았다. 학교도 좋았고 친구도 좋았다. 적극적 삶을 살고자 했다면 나는 어머니의 행복을 회피했으면 안되었다. 이혼을 적극적으로 추천하거나 스스로 등록금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공상이었을 뿐, 나는 변할 것 없는 내일을 선택했고 그 사이 나의 적극적이었다 생각되었던 행동들은 내가 방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이었다.

사랑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사랑을 사치라 말했던 것은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다.’라는 말에 심히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 절박한 포즈에 사랑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안진진의 사랑 이야기를 하나의 방관이며 회피라 보는 것이다. '행복이 불행이고 불행이 행복이라면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택하겠다'는 안진진의 말은 왠지 비참하다. 안진진은 이모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각오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안진진은 이모의 자살에 대해 자신이라면 자살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럴 각오라면 어째서 나영규인가. 나는 생각한다. 안진진도 어쩌면 자신의 방관을 조금 더 유리하게 할 수 있는 적극적 방안을 선택한 것은 아닌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지금의 사람들은 사랑이 없는 욕망만 가지고 있다 한다. 이것은 무서운 말이다. 마치 한 마리의 순한 양을 잔인하게 이빨을 드러내는 늑대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낭만주의자다. 아니, 이 시대는 낭만주의 시대이다. 사랑에 관한 노래가 수도 없이 즐비하고 사랑에 대한 드라마와, 사랑에 대한 만화책... 모든 유행은 사랑이다. 강조되는 사랑. 부각되는 사랑. 너의 사랑, 나의 사랑. 사랑. 사랑. 사랑. 그러나 이 시대에 진정한 사랑을 택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이토록 낭만적 사랑을 숭배하면서 왜 자신은 사랑이 아니라 돈을 택하고, 명예를 택하나? 이 사회는 모순이다. 사랑의 방패와 돈의 창. 창으로 방패를 찌르면 뚫리는가? 돈의 창으로 행복의 방패를 찌르면 뚫리는가? 뚫리지 않는다는 가르침의 방패를 현실의 창이 찌르면 뚫리는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나오는 뫼비우스의 띠에 비유하여 말해보자면 불행과 행복은 종이의 앞 뒤 면에 있다. 종이는 직면이므로 이 둘은 각각의 것이다. 그런데 이 종이를 한 바퀴 감아 돌렸을 때, 불행은 행복이 되고 행복은 불행이 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모순은 돈이 최고라는 황금만능주의 시대에 행복은 돈이 아니라는 것. 이모의 죽음을 사치라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살아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모는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것이었다. 살아도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재미있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재미있게 살고 싶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것이다. 이모가 안진진의 엄마 역할을 대신해주고 재미를 느꼈을 때 가졌을 자신의 존재감. 그것은 행복한 행복이다. 반면 나는 안진진의 엄마가 느끼는 행복을 불행한 행복이라 말하고 싶다. 나는 과거 방관의 자세에서 지금은 나의 방관을 위한 적극적 대책의 자세를 띄고 있다. 가정의 불화가 극을 달할 때 그것을 식히고 다시 원상태의 모습을 띄도록 돌려놓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이런 일을 할 때에 나는 간혹 생각한다. 우리 가족 중에 내가 없으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다들 제각기 살거나 혹은 누구 한 명은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나에 대해 묘한 경외심을 느낀다. 불행 속에서 느끼는 나의 존재가치. 이 불행한 행복.

나는 앞서 내가 안진진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안진진과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낭만주의자라는 것이다. 나는 나의 낭만주의에 가끔은 기가 찬다. 낭만주의일 수 있는 나의 처지는 어쩌면 생각보다 불행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낭만주의일 수 있는 것은 의외의 자만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 말했듯이 나에게 가족을 유지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또한 내가 대학생이라는 자만감, 불행을 안다는 자만감, 그러므로 남들은 알 수 없는 비관적 예술성을 안다는 자만감. 이것들은 나를 주리로 만들기도 하는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 ‘햄릿을 읽고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눈물을 흘리는(교육받은) 사람들이 이웃집에서 받고 있는 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은 마비당하고, 또 상실당한 것은 아닐까'라는 부분은 나를 안진진에서 주리로 바꿔버렸다. 이전까지 나는 이 책을 나 역시 난쟁이라 생각하며 읽었다. 그러나 이 부분을 읽는 순간 난 난쟁이(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바뀌었다. 나는 나를 피해자로 인식하는 것이 편했다. 그러면 남을 탓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런 쪽에서 ‘모순’은 나를 피해자로 느끼게 해 주는 공감 가는 책이었다. 반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이런 생각을 비꼬았다. 너 역시 가해자라고 날카롭게 꼬집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많겠지. 그 사람들한테 나는 행복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이들로 하여금 위로를 받지만 또한 그들이 보이지 않음으로써 나는 주리가 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 나오는 인물들의 삶을 보면 나보다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만 불행이 과장된 삶을 그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강대국 미국에 대한 압력, 빠른 서구화에 의한 문화지체현상이라고 말해도 될까, 그들의 아노미라고 할까. 그런데 나는 문득 나와는 동떨어져 보이는 그들의 삶이 뭔가 우리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힘이 없다는 것이다. 꿈이 없다. 정열이 없다. 무엇에 대한 문제제기의 능력도 상실되어버렸다.인간적 절망에 대해 눈물짓는 능력을 마비당한 것'처럼 뭔가 기계적이다.

그들은 왜 그런 삶을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왜 이런 삶을 살고 있을까? 가난처럼 ‘절박한 포즈 외엔 어느 것도 허락하지 않는’ 이 사회에 나는 그 의문을 던져본다. 빠져나가고 싶어도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모순적 이데올로기. 이 사회는 마치 검은 새처럼 거대한 괴물 같다. 우리의 꿈을 갈취하며 점점 커진다. 그것은 우리에게 돈이라는 종이 찌꺼기를 주고 정열을 빼앗아 간다. 파우스트처럼 행복을 가장한 불행을 선물한다. 하지만 이보다 나를 더욱더 슬프게 만드는 것은 이런 식으로 내가 책을 읽고 어떤 것을 느껴도 나의 생활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것은 앞서 내가 낭만주의자라고 스스로 강조를 한 것처럼 파우스트에게 정열을 받치고 허황된 공상만을 하는 나의 모습이 이 사회의 폐해이며 모순덩어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서 많이 들었던 말이 ‘꿈은 꿈일 뿐이다’ 라는 것이다. 공상은 공상일 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배터리 빠진 기계처럼 나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류의 일행처럼 그저 빙빙 같은 자리만 맴도는 것이다. 비판보다 수용을 앞세운 것은 서구 문화뿐만이 아니다. 나야말로 독사를 죽였어야 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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