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2 - 죽음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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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미학

 

<이문열 세계명작산책2>는 바이올렛 헌트의 〈마차〉, 미시마 유키오 <우국>, 후까사와 시찌로 <나라야마부시고>, 셔우드 앤더슨 <숲 속의 죽음>, 샤를 루이 필리프의 〈앨리스〉, 잭 런던의 〈불 지피기〉 등 죽음에 관련된 단편소설을 수록했다. (구판)

 

흔히 만화, 드라마 등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는 행위 등이 나온다. 앞에 선 여자 주인공을 구하기 위해 남자 주인공이 몸을 날려 대신 총을 맞는 장면은 사랑을 확인시키는 극적인 장면이다. 사랑과 함께 죽음은 아마도 인류의 관심사이며 지금까지 이어온 호기심일 것이다. 죽음을 실감하지 못하는 어린 나이의 아이도 죽음을 막연하게나마 공포로 느끼며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그 나이에는 쉽게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지는 못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의 죽음과 이로 인한 헤어짐으로 받아들인다. 청소년기에 들어서면 이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볼 수 있다.

 

누구에게는 '최후의 비상구'라는 환상을 주기도 할 것이다. 유년 시절의 두려움 가득한 죽음이 하나의 도피처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것이다. 흔히 죽음을 도피처로 생각하는 것은 현실의 부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마차>에서와 같은 맥락이다. <마차>는 그리고 있는 배경이 꽤나 특이하다. 다른 작품들은 인물이 살다가 어떻게 하여 죽는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마차>에서의 인물은 시작할 때부터 이미 죽어있다. 이 소설은 죽은 후를 배경으로 잡고 있고 자신들이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얘기하는 것으로 내용을 이루고 있다.

특이한 것은 (책에 그 과정이 나와있지는 않지만) 등장인물들은 육체가 죽고 영혼이 되면서 죽음의 세계에서 지켜져야 할 질서를 깨닫는다. <마차>에서는 이 죽음의 질서를 몇 가지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즉 살아있을 때 육체의 시간에서 가졌던 어떤 관념, 습성들을 버리는 것이다. 마차 안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께 있지만 그들은 서로에 대해 증오하거나 싸우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혐오스러움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정을 속세의 감정이라 치부하며 배제해야 할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이 한 행위에 대한 정당성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소설은 그 중에서도 한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마차 안에 함께 있고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재미있는 상황을 연출한다. 그런데 그 죽음의 상황은 일반적인 것과는 달라서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고맙다고 얘기를 하고 오히려 가해자가 피해자인 것처럼 느껴지게까지 만든다. 이는 피해자인 노신사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던 연유이다. 노신사에게 죽음은 그야말로 비상구였던 것이다.

조금 벗어난 얘기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노신사는 굉장한 부자였고 그럼에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반면 가해자인 코르덴 복장의 사나이는 가난하였고 그것은 살인을 할 정도로 삶에 대한 집착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나는 심청이가 인당수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어떠한 느낌이었을 지 궁금했다. 이야기 속에서 심청이는 아버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효녀이지만, 나는 그녀가 떨어질 때 해방감을 느꼈을 거라 생각했다. 자신의 삶이 아닌 아버지의 어둠을 지고 살아야 했던 심청이는 효녀라는 주위의 시선에 발이 묶여 도망 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러나 <마차>를 읽으며 심청의 죽음은 자살이기 힘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고 싶었으나 용기가 나지 않았던 노신사와 삶에 집착을 보여준 사나이. 어쩌면 생이 힘들어질수록 사람은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삶을 바라게 되는 것이 일반적 이리라.

 

죽음이 아름다움을 가질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기독교에서 자살은 굉장히 부정시 된다. 그러면 ‘마차’에서 노신사의 죽음은 어떤가? 분명 그 형태는 타살이지만 노신사가 가해자에게 감사를 표할 정도로 죽음을 원했다는 점에서 자살과 같은 모습을 띤다. 즉, 코르덴 복장의 가해자는 노신사의 자살 행위에 자신의 일생을 가지고 끼어듦으로써 피해자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노신사는 죽음이라는 원하던 것을 얻었지만 가해자는 원한 것을 얻지 못하고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차>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면 살인, 범죄 등을 저지른 가해자인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다 기독교에서 금기시하는 것들이다.

‘성 요한의 날’ 이라든지 ‘하느님’이라든지 이런 단어의 등장은 꽤나 기독교적 분위기를 띄는데 그 안에서 금기시되는 범죄행위를 한 가해자들의 죽음이 ‘미학’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죽음이 아름다움을 가질 때는 명분이 있을 때라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지하철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을 대단하다고 하고 그 사람을 칭송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는 한다. 지하철에 뛰어들어 죽은 사람은 어리석게 느껴지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라는 명분이 앞에 붙어 있으며 대단하다 하고 또한 적어도 ‘가난에 못 이겨’라는 명분만 붙어 있어도 그 죽음은 동정을 얻기에 충분하다.

 

<우국>에서 나오는 죽음이 이 명분이라는 것을 강하게 보이는데 할복이라는 것 자체가 그러하다. 중위라는 신분으로서 국가에 가져야 할 무조건적인 충성과 소중한 벗들과의 우정, 신의가 충돌하면서 다께야마는 결국 할복을 택하고 그의 부인 레이꼬도 태양 같은 남편의 큰 뜻을 따라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 소설은 아직은 신혼인 부부가 생을 포기하고 스스로의 신념에 의해 죽음을 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죽음에는 망설임이 없고 자신들의 신념, 명분에 의해 오히려 환희적으로 그려진다. 사실 나는 이런 죽음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들의 가치관과 나의 가치관이 다르다는 것은 인정한다면 그들의 신념은 존중할 만하다. 이 작품은 책의 처음에 실린 것만큼이나 죽음의 미학을 쉽게 이해시킨다. 내용 안에서조차 인물들은 죽음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씻고 화장을 한다. 또한 이들은 죽음을 결심하면서 보다 아름다운 삶을 경험한다.

 

유년 시절 '몇 살에 죽고 싶은가'에 대해 논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100세에 가깝게 오래 살고 싶다는 친구도 있으나, 꽤 많은 답변으로 30, 40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가 나오기도 한다. 그것은 젊음에 대한 환상이다. 초등학생이 중학생에 가지는 환상, 중학생이 고등학생에게, 고등학생이 대학생에게 가지는 환상은 30, 40세로 쉬이 넘어가지진 않는다.

이런 점에서 봐도 <우국>은 환상적이다. 이 작품은 신혼인 부부가 늙고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아름답고 젊은 모습으로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기 때문이다. 반면 <숲 속의 죽음>에서 노파는 젊은 나이에 죽지 않았다. 노파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끝내 그녀의 죽음까지도 불행에 찌들어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그녀의 죽음을 신비스럽게 그려내고 있다. 개들이 무슨 의식을 하는 것 마냥 그녀 주변을 빙빙 도는 거며 그녀의 죽음을 본 첫 목격자가 늙은 그녀를 아름다운 젊은 여자로 본 것이다. 사실 죽음에 있어 젊고 늙음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젊고 늙음은 삶의 시간이고 죽는 그 순간 육체는 사라지는 것을. 물론 <우국>에서 중요한 것은 아마도 죽음이 가져다주는 삶의 가치일 것이다.

 

돈과 명예 모든 것을 다 가지면 불로불사에 욕심이 생긴다 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삶이란 말이 없어질 테고 이는 사는 것이 사는 게 아니게 된다. 영원히 산다면 종족번식은 없어도 되고 이는 사랑 자체에 위협을 끼칠 수도 있다. 사랑과 같이 살면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이 하나둘씩 없어지고 결국 영원한 삶은 영원한 죽음이 되어버리고 말지도 모르는 일이다.

 

젊은 나이에 죽고 싶다는 것이 젊음에 대한 환상이라면, 오랫동안 살고 싶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집착이다. 때문에 안타까운 것이 바로 <나라야마부시고>이다. 오린은 건강하다. 그러나 그녀가 살고 있는 배경은 그녀의 건강을 허락하지 않는다. 먹을 것이 부족하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모든 미덕은 오린의 건강을 악덕으로 만들어버린다. 70세가 되면 졸참나무산으로 가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미덕인 것을 오린은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린은 미덕을 행하려 노력하는 인물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으며 추운 겨울 졸참나무산에서 굶어죽는, 혹은 얼어죽는 노인들을 상상할 수 있다. 이는 할복이나 아니면 <불 지피기>의 혹한에서의 죽음도 아니라서 그보다 더 긴 시간,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죽음이다. 그래서 그 죽음은 더 무섭게 느껴진다. 나는 이 공포스러운 죽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오린의 모습에서 묘한 경외감까지 들었다.

오린의 모습과 대조되는 것으로 소설에서는 마따가 나온다. 마따는 죽음을 거부하는 인물이다.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마따는 마침내 아들에 의해 지옥의 골짜기에서 떨어지는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다. 이들이 비극적 죽음의 형태를 띠는 것은 삶에 집착하는 마따와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든 죽이려 하는 돈집 아들의 모습이 부각되기 때문이다. 반면 오린 쪽은 오린이 죽음을 태연하게 맞이하는 모습과 (여기서 죽음은 자신의 입을 줄여 남이 먹을 것을 더 만들어주는 이타적 행위로 이해된다.) 어머니를 졸참나무산으로 보내기 싫은 아들 닷뻬이의 정이 보이면서 아름다운 죽음을 만드는 것이다. 이 외에 질투와 독점욕으로 굶어 죽게 된 앨리스의 이야기나 혹한에 얼어 죽은 사나이의 이야기도 재미있는데 이들에게서 미학을 찾기란 여간 아리송한 게 아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가지는 집착은 삶에 가진 집착이기도 하다.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자신에게 먹이를 주는 존재로서 어린 자신의 생존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 인물인 것이다. 그런 자신의 삶과 같은 존재가 자신에게 등을 돌린다고 느낌으로서 앨리스는 삶에 대한 집착과 살고자 하는 허우적거림을 보이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자 결국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아니, 선택이라 말하기에는 좀 틀린감이 있다. 소설에서 보면 앨리스는 점점 더 퇴행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즉, 앨리스가 극단적으로 나설 때에 그녀는 7살보다 더 어린 정신연령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어린아이에게서 어머니는 생존의 의미이니 앨리스는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 지피기>에서 재미있는 것은 사나이가 어떻게든 살고자 노력하는 시간은 고통적인 시간임에 반해 그의 죽음은 ‘평생 맛본 가운데 가장 편안하고 달콤한 잠’으로 표현됐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죽음의 미학이란 그 상황(사건)뿐만이 아니라 객관적 문체라든지 하는 문학적인 측면까지 포함한 것 같다. 앞에서 한 질문이지만 죽음이 아름다운 까닭은 무엇인가? 죄인들의 죽음까지도 미학으로 표현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명분보다 더 근본적으로 삶을 접는 데에서부터 오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정하면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라 미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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