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누도 잇신,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이창동, <오아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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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등장하는 장애의 모습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오아시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걷지 못하는 장애를 갖고 있는 쿠미쿠는 스스로를 '조제'라 칭한다. 책을 읽고 책 속의 인물이 되어보는 것. 그것은 쿠미쿠에게 있어 현실로서 도피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쿠미쿠의 할머니는 쿠미쿠를 '조제'라 부르지 않는다. 할머니는 쿠미쿠를 '고장 난 물건'이라 말한다. 현대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다. 그런데 조제는 많은 책을 읽어 다분한 지식은 있으나 (하지만 이 지식이 진정 살아가는데 필요한 지식인지는 의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노동이란 요리뿐이다. 사실 그녀가 갖고 있는 능력이 요리를 하는 것뿐 일리는 없다. 하지만 장애인이라는 편견은 그녀의 상품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점점 도태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조제도 마찬가지로 할머니에게, 이웃에게, 복지과 사람들에게, 츠네오에게 의존하며 살아나간다. 조제에겐 할머니, 이웃, 복지과 사람들, 츠네오에게 의존하는 것이 자신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할머니는 조제를 새벽에 유모차에 태우고 남들이 보지 못하게 가린 다음에 외출을 한다. 할머니는 츠네오가 쿠미쿠를 데리고 외출을 하자 크게 화를 내는데 그때 우려했던 것 하나가 '이웃이 보면 어쩌려고'였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사람들에게 장애를 더러운 것, 벌레 같은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장애인의 사회적 활동은 굉장히 적다. 영화에서 조제가 이웃에게 들키지 않게 다니는 것은 비장애인과 장애인과의 만남을 극히 제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장애인과 접촉이 적은 비장애인들은 더욱더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게 된다. 즉, '사람들의 편견 - 장애인을 소외 - 사람들의 편견'이라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조제를 싫어하는 것일까? 아니다. 싫어한다면 굳이 조제를 데리고 외출을 하지도, 조제가 좋아하는 책을 주워 모아 주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할머니는 조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조제의 신체적 장애는 어차피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장애인과의 만남이 많다면 장애인과 비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이 사회에서 조제는 더욱더 상처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를 사회와는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야 조제가 가지게 될 아픔도 적을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츠네오에게 조제는 고장 난 물건이므로 총각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것은 할머니가 장애인이 사회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죽은 후 조제와 츠네오는 동거를 하게 되고 조제는 츠네오를 통해 사회와의 접촉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우려한 대로 결국 조제와 츠네오는 헤어졌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조제가 좌절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제는 처음에 누군가가 끌어줘야 하는 유모차로 할머니에게 의존했다. 이때에는 극히 사회와 접촉이 없었던 때라 그녀는 시퍼런 식칼을 들이미는 난폭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후에는 츠네오에게 업혀 다님으로써 비장애인과 접촉(그리고 의존)을 하고 츠네오와 헤어진 이후에는 전동유모차를 타고 스스로 사회와의 접촉을 유지하는 희망적인 결말을 선보인다. 반면 츠네오의 결말은 눈물이다. 영화에선 유독 츠네오가 조제에게 무엇을 사다주는 부분이 많은데 그것은 비장애인이 장애인에게 가지는 동정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정부의 개축 정책을 믿지 못하는 할머니에게 개축을 설득한 것 등의 츠네오의 모습은 왠지 비장애인인 자신이 장애인에게 내리는 자선 같았다. 왜냐하면 복지과의 사람이 츠네오에게 '요즘 너 같은 젊은이가 있다니'라는 말이나, 츠네오를 쉽게 취직시켜주려는 것 등의 모습이 왠지 장애인을 이용하여 자기 권위를 세우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뭐 시작이야 어쨌든 츠네오와 조제는 동거를 했고 그들 나름대로의 사랑을 한 것 같다. 하지만 츠네오는 결국 조제와 헤어짐으로써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랑을 성공시키지 못했다. 비장애인인 츠네오에게 장애인인 조제와의 일상은 사랑하지만 지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그 속에서 나약해진 츠네오는 도망쳐 나온 것이다. 즉, 이 영화는 비극적인 결말이지만 희망을 주고 있다. 앞에서 말한 복지과 사람의 말은 츠네오의 자기 권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츠네오가 장애인인 조제와 접촉을 많이 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졌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오아시스>

 공주는 비둘기와 나비를 환상으로 본다. 자유롭게 날 수 있는 비둘기와 나비, 이것은 공주가 바라는 것이며, 비장애를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공주가 비 장애를 자유롭다고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떠한가, 종두는 어떠한가. 종두는 신체는 멀쩡하지만 자유롭지 않다. 그는 전과자이며, 또한 정신적으로 그다지 정상인처럼 보이지 않는다. 장애를 가진 공주가 보는 비장애가 사실은 상상과는 상당한 차이를 보임으로써 판타지와 현실관의 차이, 사회의 모순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주의 환상을 가만히 지켜볼 때, 종두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 공주의 환상도 달라졌다. 비유를 섞어 말하자면 너무 열등감에 목이 타 들어가던 그녀가 오아시스를 만났다, 그녀는 오아시스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더 이상 비둘기나 나비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확인한다, 그 모습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목을 축인다. 즉, 그녀가 비장애인 종두로 하여금 느낀, 자신도 비장애인 것 같은 대리만족은 그녀의 내면, 영혼의 진실된 모습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것은 판타지일 뿐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다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짐작하게 된다. 공주와 종두, 서로에게 오아시스 같은 존재인 그들을 사회는 쓸모없는 쓰레기와 혐오스러운 벌레로 만들어버린다. 장애를 고립시키고 이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의 진정한 모습을 못 보게 함으로써 우리의 눈을 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장애가 아닌가, 공주의 눈에 비장애가 나비와 비둘기로 보인 것 같이 우리의 눈에 장애는 벌레처럼 보인다. 그러나 공주가 종두와 만나면서 공주 본연의 진실한 모습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도 그들과 경계를 짓지 말고 가까이할 때, 서로의 소통이 충분히 이루어질 때에 그들을 진정으로 바람직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공주가 정상인으로 보이는 장면들은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하는 공주의 꿈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주인공 종두가 공주를 바라보는 관점을 보여주는 것도 포함한다. 즉 종두가 공주를 편견 없이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보면 공주를 가족잔치에 데려가거나 식당에 거리낌 없이 데려가는 모습들은, 공주를 정상인과 동일시하는 행동이다. 또한 영화에서 나오는 환상들은 결국 꿈일 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가 공주의 환상을 보고 참 안됐다는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그때뿐 장애인인 공주를 현실로 데려오기에는 현실은 장애인인 그녀에게 가혹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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