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최승자,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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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여성시와 최승자 시인의 <즐거운 일기>

최승자, <즐거운 일기>

시대에 따른 한국의 여성시

2000년대는 사이버 시대이며 가상현실이 익숙한 시대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하듯 2000년대에는 문학에 환상성, 가상현실 등이 대폭 도입된다. 판타지 작품들이 인기를 끌고 인터넷의 역할이 증대됨에 따라 문학이 다른 예술과도 활발히 교류하게 되었다.

이원은 시집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에서 디지털적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다. <몸이 열리고 닫힌다>에서도 이원은 디지털 방식으로 사고하고 대화하는 새로운 세대의 건조하고 황폐한 감수성을 탐구하고 드러내고 있다. 또한 컴퓨터, 디지털이라는 무감각적이고 딱딱한 세계의 이미지를 여성의 몸과 죽음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이 외에 진은영의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익숙한 것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내리며 이전의 시와는 다르게 쓰겠다는 자의식을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김행숙의 <사춘기>는 중심에 편입되지 않고 떠도는 사춘기 시절을 통해 타자의 목소리를 전달하고 있다. 2000년대의 여성시는 디지털시대를 반영하면서 저마다 개성적인 방식으로 이전의 시를 거부하며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문학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 문학은 권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18세기 이전 글을 쓰는 사람들은 파트롱이라고 하는 그들을 후원 혹은 보호해주는 귀족에게 자신의 글을 바쳤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들은 삶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글이란 파트롱을 비롯한 지배계층의 이념을 정당화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문학과 권력이 멀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문장가, 독서인이라고 불리는 사대부 역시 보편적 이념을 보존, 전파하는 일에 심려를 쏟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의 문학은 지금의 문학과는 그 개념이 많이 틀리다. 이때의 문학이란 창작보다는 편찬 등의 주로 지식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문학이 지금처럼 미학적 면모를 부각하게 된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시민혁명으로 인해 귀족이 몰락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파트롱을 잃었다. 그들은 생존에 위협을 느끼게 되면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성찰해보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들은 권력을 위해가 아닌 자신을 위해 글을 쓰게 되었고 자신만의 개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대가 변하면서 문학의 개념 조차 변하는데 문학 안에서의 달라지는 양상이 없을 리 없다. 문학은 독자와 시대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지는 유동성을 지니며 그 시대상을 강하게 반영할 수밖에 없다. 문학이란 결국 사람이 쓰는 것이고 사람은 시대와 사회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 문학도 시대가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여성주의도 변하기 때문에 따라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문학의 고발성에 대해 그다지 중점을 두지 않는다. 어떠한 문학이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쓰는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사회상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굳이 그것을 부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회 고발적인 작품들과 페미니즘적 비평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것이 고발성을 염두해 두었기 때문이라기보다 비관적인 것에서 비로소 예술성을 찾게 되는 예술가의 습성(?) 때문일 것이다.

좋아하는 여성 작가, 최승자

내가 좋아하는 여성작가를 꼽으라면 나는 최승자와 이선영, 이원을 꼽을 것이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초등학교 졸업 이후 판타지 소설이 아니면 소설은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내가 접해본 문학이란 고등학교 시절 처음 읽기 시작한 시집 몇 권뿐이다. 저 중에서도 가장 나에게 영향을 끼친 시인을 고르라면 나는 최승자를 꼽을 것이다. 시는 예뻐야 하며 아름다운 언어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시에 대한 온갖 그릇된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내 머릿속을 깡그리 비운 것이 바로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였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때 문예부에 들게 되면서 나는 선생님에게 시작(詩作)에 대한 강의를 받기 시작했다. 비유며 상징이며, 낯설게 하기 등을 배우면서 나는 한 번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쓰지 못했던 것은 내가 가지고 있던 시에 대한 통념 때문이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읽어본 시집이 바로 언니의 추천으로 읽은 최승자의 <즐거운 일기>다. 이 책은 나에게 시작에 대한 어떠한 이론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이것이 바로 시(詩)다’를 보여준 표본이었다. <즐거운 일기>를 읽고 났을 때 나는 그 재미에 대해 흥분한 상태였다. 자극적이고 강렬하고 그러면서도 너무나도 어두워서 숨막히는 느낌에 깊이 매료된 것이다. 시(詩)라는 것은 참 신기한 것이 이해하지 않았는데도 느낌이 있다. 머리가 아니라 감각으로 먼저 느끼는 것이다. 시뿐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그럴지 모르겠지만 시는 특히 그런 점이 더 강하게 다가왔다.

내가 <즐거운 일기>를 읽고 너무 재밌다고 언니한테 말하자 언니는 내가 그 시집을 다 이해했는지 물어봤지만 나는 당연히 절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를 배울 때면 꼭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사회적 배경과, 작가에 대한 소개 등을 제시하며 해석한다. 가슴으로부터가 아니라 머리로부터의 주입은 그다지 재미를 느낄 수 없다.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시에 대한 해석을 잘 못한다. 화술(話術)이나 문술(文術)도 출중하지 못하거니와 애초에 머리에서 확연히 해석할 줄 모른다. 그저 눈을 감고 손으로 더듬기만 하는 것이다.

내가 더듬은 <즐거운 일기>는 내 머릿속에 최승자의 이미지를 죽음으로 그려놓았다. 나는 어느새 최승자를 가정이 없는 여성,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 죽어 가는 여성으로 그리고 있었다. 이런 최승자의 모습은 나에게 동경스러우면서 두려운 것이었다.

이후 이선영의 <평범에 바치다>는 나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으며 최승자와는 달리 행복하게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고(최승자가 정말 가정이 없는지는 모른다. 다만 내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최승자는 가정이 없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여성이다.) 평범한 여성의 일상 속에서 시를 써내려 갈 수 있다는 안도감이 들게 했다. 최승자의 시처럼 자극적인 세계는 아니지만 평범함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재밌는 시 세계이다. 그리고 이원의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는 특이함 그 자체였다. 디지털이라는 현실이 결국 시 세계까지 침투하여 새로운 서정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최승자,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는 내가 좋아하는 최승자의 시 중에 하나이다. 내가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부정하고자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서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는 시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몰랐지만 오직 그 느낌만이 마음을 울렸다. 시의 첫 연부터 느껴지는 허무함과 체념은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를 강력한 의지가 아닌 어쩔 수 없는 토로로 만든다.

사랑은 인류가 생겨난 이래 끊임없는 관심사이고 한 번도 부정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모두의 환상이며 희망이다. 그러나 최승자는 그런 사랑의 실리성에 대해 묻는다. 내가 아무리 널 사랑하고 너가 아무리 날 사랑한다고 해도 달라지는 게 뭐냐?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냐? 이것은 최승자 본심의 물음이 아니라 사랑의 낭만을 깨는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지적으로 향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익과 손해만을 따지는 이 곳에서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폭력일 뿐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랑은 나의 자아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파괴하고 분열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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