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김기덕, <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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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환상 사이 <빈 집>이 있다.

김기덕, <빈 집>

<빈 집>에서 볼 수 있는 일상의 모습

영화에서 등장인물들은 외로움과 아픔을 가지고 있다.

빈집을 자기 집처럼 사용하며 꿈처럼 살고 싶지만 언제나 현실에 부딪치는 남자, 남편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감금당하는 여자, 사랑을 갈구하지만 외면당하는 남편.

 

현대인은 누구나 섬처럼 서로 단절되어 고독감과 소외감을 겪는다.

그것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빈집이다.

문을 꼭 잠그고 외부인의 침입을 방어하는 집 안은 생명의 부재중으로 공허한 공간이다.

이런 공간은 현대인들의 무관심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진다.

빈집에 붙여져 있는 전단지나, 빈집이 아니더라도 땅에 떨어져 나뒹구는 전단지는 사람들의 무관심을 잘 보여주는 도구이며 이것은 빈집처럼 무관심하게 방치된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나타난다.

 

남자는 이런 현실을 부정하는 인물이다. 그는 빈집을 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무관심한 일상으로 망가진 시계, 오디오 등을 고친다. 나아가 그는 빈집에 갇힌 선화에게까지 침범하여 그녀의 일상에 변화를 제공한다.

선화는 사회적 통념 속에 억압되고 강요당하는 삶을 사는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현대인에게 일상은 가끔 참기 어려운 답답함을 제공한다.

우리가 일상속에서 흔히 접하는 전화기는 누군가의 일상을 점검하는 도구가 됨으로써 선화와 태석을 현실로 끄집어낸다.

다정한 가족사진과는 다르게 부부싸움을 하는 모습은 꿈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무너져가는 가족 간의 균열이라는 현대인들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고장 난 체중계는 현실에 대한 심리적인 무게를 보여주며 말라비틀어진 식물의 그림이나 퍼즐처럼 흐트려놓은 선화 자신의 누드사진은 각박한 현실에 무너져버린 현대인의 자아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눈이 180도. 나머지 180도에 너 지금 숨은거야? 그건 불가능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곳이 바로 '현실' 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나 당연하게 현실이 제공하는 일상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현실의 차원만이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영역의 전부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영화 속에서 태석을 감독하는 경찰은 '인간의 눈이 180도. 나머지 180도에 너 지금 숨은거야? 그건 불가능해!'라고 말한다.

우리가 볼 수 있는 180도의 현실 뒤에는 180도의 환상이 존재한다.

그리고 선화와 태석은 그 180도의 환상에 안착하려 하지만 번번이 현실로 끄집어 내려지고 만다.

현실에 치이고 치여 마음은 너덜너덜해지고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해질 때 우리는 현실도피의 하나로 환상을 꿈꾼다.

 

영화의 첫 장면은 성스러운 상을 향해 날아가는 골프공이 그물망에 막혀 떨어지는 장면이다.

남편의 폭력이라는 고통스러운 현실에 갇힌 선화에게 나타난 태석은 골프공을 막아주는 그물망 같은 존재이다.

태석은 선화를 현실에서 도망가게 만들어 주는 만능 기술자이며 선화가 바라는 환상이다.

이런 선화의 환상 속에서 빈집은 단절되고 소외된 공간이 아닌 태석과의 만남의 장소, 일상에서의 탈피라는 환상의 공간이 된다.

하지만 몽상적인 음악과 대립하는 초인종 소리, 전화 벨소리 등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보여주면서 현실과 환상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확인시킨다.

 

불가능하다는 경찰의 말은 우리의 생각을 대변한다. 하지만 태석은 출감한 이후 180도의 환상에 안착한다.

반면 선화는 360도의 공간, 현실과 환상이 타협하는 공간에 위치하게 된다.

이것은 앞서 골프공에 맞아 헐떡거리는 여자를 보고 뒷걸음쳐 그 자리를 피한 태석과 기억이라도 해 두듯 눈에 여자의 모습을 새겨두는 선화의 모습에서 예상할 수 있던 결과였다.

골프공에 맞아 헐떡거리는 여자의 모습은 환상 속에서 안착하려는 태석의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침범하는 현실의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것을 태석은 거부하지만 선화는 씁쓸하게 지켜봄으로써 자신도 결국 현실을 벗어날 수 없음을 예상하게 해 준다.

 

환상은 무게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필요 없는 것이 아닌 공기와 같이 말이다.

환상은 110kg, 65kg 등의 우리 현실의 무게, 심리적인 압박감을 0kg으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하나의 도피처이다.

 

無의 존재론, <빈 집>

내가 '무(無)의 존재론'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남자의 생사 문제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자가 입고 나온 검은색 옷은 마치 장례식에 가는 옷차림 마냥 남자의 죽음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마지막에 나오는 0kg의 체중계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사실, 남자의 생사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는 남자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나는 감독이 아이러니하게도 없는 것의 존재, 혹은 존재하는 무(無)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림자로 대변된다. 그늘 속에서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림자는 실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그림자라는 것은 원래는 없는 것이다.

 

그 그림자를 있게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

감옥에 가기 전의 남자를 무(無)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그는 빈집, 비어있는 집, 즉 빈집이라는 것 자체가 보이는 무(無)의 존재론에 실체이다.

하지만 남자가 새처럼 비상하다 사라지는, 날개를 폈다 접는 그림자가 되었을 때(그림자뿐만이 아니다. 침묵의 대사, 즉 존재하는 침묵, 그리고 0kg의 무게, 즉 존재하는 무게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의 실체는 여자이다.

여자가 남자를 무(無)로써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때에는 남자 자체가 빈집이 되고 여자는 남자의 행동을 따라 함으로써 남자의 역할(실체)을 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러니의 반복, 무(無)의 존재론 자체가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혼란스럽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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