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최인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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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과 시극의 역할

최인훈,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

아기장수 용마산 전설

 최인훈은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를 읽으면서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어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보니 '아기장수-용마산 전설'이 떠올랐다. 옛날 산 밑에 살던 어느 부부에게 용마가 태어나자, 이 사실이 알려지면 집이 망하고 모두 죽을 것이 두려워 아이를 맷돌로 눌러 죽였다는 비극적인 전설. 최인훈의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는 이 설화에 대한 이야기다. 따라서 그 결말이 비극적일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가난한 부부에게 아이가 태어난다. 때에 맞춰 용마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관가의 수색이 이어진다. 용마의 울음소리는 아이의 신통력과 비범성을 나타내며 절대자가 내세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가 장수임을 알게 된 부모는 관가의 위협으로 아이를 자루로 눌러 죽이게 된다. 아이의 어미는 자살하고, 아비도 죽으려 하나 이때 부활한 아기장수가 용마를 타고 나타나 어미를 살리고 셋이 승천한다. 기이하게 혹은 비범하게 태어난 인물이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공을 세우는 영웅 서사적 해피 엔딩을 기대해 볼 만도 하건만 이야기 속의 아이는 영웅이 될 틈도 없이 어이 없을 정도의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그러나 그 비극은 독자만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다시는 오지 말라며 아이의 죽음을 춤으로 배웅한다. 그들은 아이의 탄생으로 급습한 공포로부터 벗어났으며 죽음으로 그것에서 해방됐다. 그들은 안도와 평화를 얻었다. 고전적인 영웅 서사는 비범한 탄생으로 시작한다. 비범한 탄생이란 고귀한 혈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분이 낮은 자에게는 비범한 탄생 조차 허용되지 못한다. 그저 기이하고 불행한 탄생일 뿐이다. 그들은 영웅을 바라지 않는다. 그것이 영웅을 꿈꾸지 않아도 될 정도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염원은 아닐 것이다.

등장인물의 역할과 시극의 역할

 울음 소리로 등장하는 아기장수는 말을 더듬지 않는다. 이는 민중의 염원을 나타낸다. 반면 말음 더듬는 아비는 '못난 사람'의 직관적 표현이다. 그는 아기를 죽이는 역할이며 민중이 자신의 꿈을 스스로 제거해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개똥 어멈은 해학적인 인물이다. 그녀의 농담과 말장난은 무거운 분위기를 이완시키며 민중들의 끊임없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할머니는 어미의 죄책감과 모성애를 극대화시키고 자살로 이끄는 촉매 역할을 한다. 백성이 원님보다 더 높은 데 있어야 한다는 이상적 국가의 모습을 제시하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의 '우리 마을에 장수가 나타나면 안 돼.', '다른 마을에서 나왔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이고 양가적인 마음은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물상을 보여준다. 이 작품을 보면 지문들이 모두 시처럼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등잔불이 흐릿하다.’가 아닌 ‘흐릿한 등잔불’, ‘기척/귀를 기울인다./바람 소리’이런 형식으로 시작하는 작품은 생소했지만 짙은 서정성을 가지고 다가왔다. 이처럼 운문이나 시의 형식으로 쓰인 희곡을 '시극'이라고 한다. 잠시 <햄릿>이 떠올랐다. <햄릿>을 보면 고귀한 신분의 인물의 대사는 시에 가깝다. 반면 신분이 낮은 인물의 대사는 일상 회화와 같았다. 시라는 것은 고급 문학으로써 햄릿과 같이 신분이 높고 고귀한 자의 품위를 더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의 배경은 고귀한 자들이 사는 곳이 아니라 옛날 어느 산골이다. 등장하는 인물들도 신분이 미천한 자들이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이 작품의 배경과 시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두 작품에서 시적 문구는 그 사용에 있어 차이가 있다. 우선 <햄릿>에서는 앞서 말했든 대사에서 시적 대화가 낭독되었다. 반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에서는 낭독되어지는 대사가 아니라 지문이 시의 형식으로 쓰였다. 이로 인하여 이 희곡은 극을 보는 사람이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문학성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작품의 내용 자체가 가지고 있는 아이러니함을 낯설게 하기로 보여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느끼도록 돕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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