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병자삼인>, <난파>, <금관의 예수>, <벚꽃동산>, <고도를 기다리며>
- 작품 탐구
- 2021. 2. 20.
조중환, <병자삼인> - ‘여성주의’ 찾기
조중환의 <병자삼인>은 오랫동안 한국을 지배해 왔던 남성 우월주의, 남존여비 사상에 대해서 화두를 던지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페미니즘적 요소와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이 페미니즘인지 반페미니즘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다.
우선 이 작품에 나오는 여자는 총 5명이다. 여교장인 김원경, 여의사인 공소사, 여교사인 이옥자. 이들은 학교라는 매개체로 이어진 지식인 집단이다. 그리고 쌀집의 업동모나 기생집의 설원은 이들과는 대비되는 비지식인 집단이다. 업동모나 설원은 남존여비사상에 어느 정도 입각해있는 여성들이다. 업동모는 남성이 여성보다 낮다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하는 여성이다. 그녀는 정필수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알자마자 무시하고 돌아서는데 이것은 단순히 능력이 없기 때문에 라기보다 남자가 남자로서의 능력이 없기 때문에 무시하게 되는 상황이다. 즉, 남성은 우월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이미 박혀있는 상태에서 정필수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멸시하는 반페미니즘적인 행동인 것이다. 설원은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우월 의식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인물이다. 남성 우월을 정당화시키고 그 아래서 이익을 보려는 반페미니즘적 여성인 것이다. 그녀들의 이런 모습은 작품 속의 남성 인물들의 상황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효과를 준다.
지식인 집단인 김원경, 공소사, 이옥자는 작품의 남성들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그녀들은 여성으로서 능력을 인정받았고 자신의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선 페미니즘적이다. 그러나 이들의 능력 우월주의는 상대방 남성을 비하시키는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에서 남성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작품은 여성의 주도로 이루어지며 그리고 결말에서 여성 인물들의 용서로 단번에 휴머니즘적인 결말이 나와버린다. 지금껏 박해받아온 남성들은, 차라리 감옥에 가겠다는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을 남편으로 인정해 주자마자 서로 손을 잡고 화목하게 된다. 이 작품의 설정은 지금껏 사람들을 지배해 온 남존여비 사상에 반대되는 상황이다.
즉, 작품 속에서 여성들은 현실에서 남성들이 해왔던 행동 그대로를 비추고, 작품 속에서 남성들은 현실에서의 여성의 모습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이 작품은 지나친 페미니즘에 대한 혹은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따끔한 경고의 메시지를 지니게 된다.
김우진, <난파> - 표현주의
표현주의는 인상주의와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감정표현이라는 의미에서 표현을 예술 창작의 본성으로 본다. <난파>를 보면 독자가 스토리의 전개나 사건과 같은 외면적 사실을 이해하기 힘들게 되어 있다. 오직 주인공의 감정과 같은 내면적 사실을 표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이미지를 계속 유지한다.
주인공인 시인은 딱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 무대의 배경 역시 개연성과는 거리가 멀다. 집 앞마당이었다가 울창한 삼림 속이었다가 카페였다가 해변으로 주인공의 내면에 따라 자유롭게 변한다. 인물들도 의식의 흐름처럼 자유롭게 등장하고 퇴장한다. 대사 역시 감정적이어서 독자에게는 불친절한 작품으로 보이기 쉽다. 표현주의는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표현주의는 마치 일기와 같다. 일기는 설명문처럼 친절하게 쓰이지 않는다. 거의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 표출이 우선이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므로 굉장히 자유로우며 자신만의 암호처럼 쓸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아빠한테 야단을 맞은 후 자신의 일기장에 아빠 욕을 잔뜩 써 놓았다고 하자. 이것은 남의눈을 의식해서 쓴 것이 아니라 화가 나서 쓴 것이고 또 어떠한 형식을 갖춘 게 아니라 자유롭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이 일기를 보게 된 경우, 그 사람은 이 아이가 아빠한테 혼났다는 사실은 알 수 없지만 이 아이가 무척 화가 났다는 것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난파>는 마치 일기 같다. 상황은 혼란스럽고 마치 암호처럼 잠깐씩 단서만 던져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김우진의 가족사와도 크게 닮아있어서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의 막연함은 수그러든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증, 그리고 유교적인 아버지와 여러 계모들 슬하에서 자란 그가 작품 속에서 ‘시인’으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그저 개인의 푸념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이 의미 있게 읽히는 것은 유교적 질서 하의 전통적 가치관과 새로운 개인주의적 가치관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감대를 얻어내며 그 사회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김지하, <금관의 예수> - 대립구도
<금관의 예수>는 철저히 대립구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기득권자와 소외계층의 대립구도이다. 신부, 배때기, 순경은 기득권자다. 순경은 민주주의의 앞잡이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앞잡이며 자신이 가진 힘으로 어려운 자를 더욱더 핍박한다. 배때기 역시 물질을 탐욕하며 부귀를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며 신부는 어려운 자를 도와야 하는 종교적 입장에 위치해 있음에도 어려운 자를 외면하고 권력의 편에 서있는다. 반면 어려운 자를 도우려는 수녀나 장애를 가진 문둥이, 돈 없는 거지, 회피하는 대학생, 창녀 등은 피 기득권자다. 또한 이 작품은 예수, 수녀, 문둥이로 대표되는 선과 신부, 배때기 순경으로 대표되는 악의 대립으로도 볼 수 있고 수녀와 창녀로 대표되는 여성과 신부로 대표되는 남성의 대립, 적극적 여성인 수녀와 소극적 여성인 창녀의 대립구도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대립들은 물질 만능 주의에 빠진 시대상을 여실히 보여주며 갈등을 심화시킨다. 물질만능주의 시대에서 선을 추구해야 하는 종교계마저도 혼란에 빠지고 예수의 가시관은 금관으로 바뀌어 인간의 탐욕을 상징하게 된다. 금관은 예수의 발언권을 상실시키며 나아가 사회의 옳은 주장을 근절시키려 한다. 지식인으로서 옳은 말을 해야 하는 대학생은 도망만 다니고 선을 전도해야 하는 신부는 금관과 같은 양털 머플러를 찾는다. 3장 끝에서 배때기가 “엇, 내 금관이!”라고 하는 것처럼 금관은 더 이상 예수의 것이 아닌 물질 만능 주의의 기득권자들의 것일 뿐이다. 그리고 4장에서 스포트는 배때기-순경-신부-대학생 순으로 비치고 문둥이에게는 길게 발언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지 않는다. 스포트 앞에서 배때기는 자신만만하며 순경은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고 신부는 현실성 없는 얘기만 하며 대학생은 도망만 다닌다. 이들의 토로는 물질 만능 주의 시대의 비참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 <벚꽃동산> - 사실주의
<벚꽃동산>은 기존에 보아왔던 전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기존에 권선징악적 구도, 낭만주의적 구도에 따르면 벚꽃동산은 팔리지 않고 라네프스카야와 가족은 그곳에서 계속 잘 사는 것으로 결말이 나야 했다. 그것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고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러나 이 작품은 냉혹하게도 그들을 떠나보내고 로빠힌에게 벚꽃동산을 준다.
사실주의는 현실의 세부 사항을 강조하고 삶을 진실하게 묘사한다. 현실에서 보면 벚꽃동산은 팔리는 게 사실적이고 그로 인하여 관객들은 실제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 문제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비극은 <오이디푸스 왕>, <햄릿> 등 주인공이 고귀한 신분이었다. 비극은 고귀한 신분의 자가 자신의 오만함, 혹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파멸하는 것이 정석이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산업 혁명은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 놓았고 사실주의 극의 등장인물들은 고귀한 신분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쓰게 되었다. 언어 역시 <오이디푸스 왕>이나 <햄릿>에서처럼 고귀한 운문체가 아니라 일상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무대장치는 최대한 실제와 비슷하게 설정하여 마치 ‘제4의 벽’을 통해 연극을 보는 듯하게 하였다.
<벚꽃동산>에서 인물들은 답답할 정도로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 사실은 이것이 그들이 벚꽃동산을 떠나야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의 시간에만 집착하는 그들은 결국 빠르게 바뀌는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로빠힌으로 대표되는 신흥세력에게 자신의 공간을 뺏기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것임에도 라네프스카야 가족에게 연민의 감정이 가는 것은 사실주의가 강조하는 현실 그대로의 모습이 행복하지만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사무엘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 변화를 기다리는 현대인의 반복되는 삶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계속되면 시간이 멈춰진 게 아닐까 싶은데도 어느새 나이를 먹고 모습이 변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등장인물들처럼 매일매일 똑같아서 하루만 같은 세월에 에스트라공은 발이 자라 신발이 작아지고, 포조는 눈이 멀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있다. 현대인들은 이러한 반복되는 삶 속에서 영화를 보고 만화를 보고 책을 보며 그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만족을 한다. 영웅이 되고 싶어 하고, 혹은 자신에게 주인공과 같은 상황이 닥쳤을 경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펼칠 영웅담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은 그런 상황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 따분한 삶 속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자꾸 무언가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들이 행하는 행동은 고작 신발을 살펴보고 모자를 살펴보는 것뿐이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심리가 존재한다. 모험을 해보고 싶은 심리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심리가 그것이다. 자유를 꿈꾸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모험을 해보고 시끄럽게 살아보고 싶은 게 전자의 심리라면 그저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소박하고 조용하게 살고 싶은 게 후자의 심리다. 그러나 사람이란 게 여름이 되면 겨울을 기다리고 겨울이 되면 여름을 기다리다 보니 시끄럽게 살다 보면 조용하게 살고 싶어 하고 조용하게 살다 보면 시끄럽게 살고 싶은 법이다. 지극히 조용하게 사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이 자유와 모험을 꿈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이런 현대인들의 모습을 대변한다. 서로 말이 잘 통하지도 않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으면서도 고도를 기다린다는 하나의 목적으로 같이 있는다. 어쩌면 그것은 같이 있고 싶기에 하는 변명일 수도 있다. 개인적이고 외로운 현대인들의 삶에는 변화가 많지 않으며 사건은 둘 이상의 충돌이 있어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현대인들과 가장 닮은 점은 그 변화를 기다리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고도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소년을 따라가 볼 수도 있는 노릇인데 그들은 만났다고만 전하라고 한다. 정말 그들은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현대인들 역시 변화를 꿈꾸지만 굉장히 수동적인 모습이다. 적극적으로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막상 변화가 올 것 같으면 현실이 깨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무서워 벌벌 떤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의 삶과 매우 닮았다. 그래서 사건들이 하나도 개연성이 없음에도 우리는 공감하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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